작성일 : 2011-12-05 18:28
:: [패러다임 시리즈 1] 진정한 패러다임 변화는 필연적 공백상태를 동반한다 ::

 글쓴이 : 최재윤
조회 : 789
최재윤    | 2006·05·23 17:04 | HIT : 2,386 | VOTE : 506 |
 
   
패러다임 강의를 할 때면
자주 인용하곤 하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아마도 1997년 혹은 1998년 중앙대 경영학과에
출강하던 때로 기억된다.
그 학기에도 개설과목의 본 강좌 진도를 나가기 앞서,
학기초 2~3주간에 걸친 패러다임 강의를 마칠 즈음이었다.

패러다임 강의를 들은 한 학생으로부터 e-mail이 왔다.

내용인즉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의미였다.
"....교수님의 패러다임 강의는 제가 대학에 들어와
지금까지 들었던 많은 강의중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귀중한 가르침에 감사드리며, 지난 시간 강의를 듣고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겨 메일을 드립니다.

첫째질문은, 교수님께서 '패러다임 바꾸기는 내면의 안경바꾸기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내면의 안경을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둘째질문은,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그 자체도
일종의 패러다임이 아닐까요?라는 질문이었다....."

나는 최근까지도 '패러다임 강의'를 할 적이면
이 학생의 질문내용을 청중들에게 거의 빠짐없이 인용하곤 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신을 함께 소개하면서.....

그 때, 이 학생에게 내가 보낸 이메일은
다음과 같은 요지였던 걸로 기억한다.

".....둘째 질문에 대한 제 생각부터 적겠습니다.
맞습니다.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
그 자체도 일종의 패러다임입니다.

그리고 '내면의 안경을 바꾸었더니 아무 것도 안보입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는 첫째 질문에 대한
제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빨리 안과에 가보세요.......'"

그리고 나는 이 학생의 마지막 '질문'과 그에 대한 나의 '답변' 역시
모두 수준 높은 위트(?)라고 생각해왔다.
청중들 역시, 이 부분에선 한 바탕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그런데, 이 질문을 받은지 7~8년이 지난 최근에 와서야
이 학생의 질문이 그렇게 단순히 위트로 받아넘길 내용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것도 여전히 동일하게 이 위트를 소개한 어떤 강의 다음날,
한강 강변도로를 따라 늦게 시작한 신학대학원 수업을 듣기 위해 등교하던
2005년 4월의 어느 봄날 아침에 말이다.

그 날 따라 강북강변도로는 교통정체가 유달리 심했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강변도로를 따라 펼쳐진 한강의 새벽경치를 감상하며,
전 날 있었던 한 대학원의 초청특강을 다시금 곰씹고 있었다.
혹 실수는 없었는지, 새롭게 개선한점은 없는지 등 등.

그 때 문득 새로운 의구심이 머리를 스쳤다.
그것은 7,8년 내게 질문한 그 학생에 대한 나의 답변이
매우 무책임한 답변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질문을 던진 이젠 이름조차 잊은 그 학생이야말로
'진정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기존 인식체계와의 완전한 결별'을 의미한다.

따라서 새로운 인식체계로의 전환 과정은
'필연적으로 공백상태'를 야기시킬 수 있다.
단, 새로운 인식체계로의 전환이
'구 인식체계'와 동시적으로 대체가 발생하는
아주 드문 예외의 경우를 제외하곤 말이다.

그러나
만약 새로이 대체될 인식체계가 전이되지 않은 상태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발생한다면 상황은 달라지게 된다.
이 경우에는 '구 인식체계의 폐기'만을 발생시킬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빈 공간을 채우기까지는
일시적 공백상태를 야기시키게 된다.

'내면의 안경을 바꾸었더니
이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이 학생의 질문은
내가 처음에 인식했던 것처럼
단지 교수를 웃기기 위한 수준 높은 유머(?)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7,8년이 지난 이제서야 다시금 그 질문이 함축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무서운(?) 의미를 내가 인식한 것처럼
"진짜 무서운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만약 후자의 의미로 보내온 질문이었다면,
그 때 보낸 내 답신은
정말 愚 敎授의 우답(愚答)이었다는 점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 하니라(행9:8-9).
본문은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동등하여
대제사장에게까지 예수의 제자들과 그 도를 좇는 자들을 핍박하기 위한 공문을 
요구하던 '핍박자 사울'에서 '예수 증거자 바울'로 변화되던
그 유명한 다메섹 도상 사건이다.

물론 여기에서는
'내면의 눈'이 아닌 '육신의 눈'에 도래한
공백상태를 묘사한다는 상이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육체의 눈이던, 내면의 눈이던
그 전환의 폭과 깊이가 크면 클수록
그에 상응하는 공백상태가 존재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내가 그 때 그 학생의 질문에 대한 온전한 답변을
강의한지 7~8년이 지난 이제서야 깨달았다는 점에서
왠지 모르게 그 때 그 학생에 대한 미안함이 엄습했다.

아울러 항상 그래왔듯이
이제서 늦깍기로서의 중요한 진리를 또 새롭게 배운다.

지금 나의 생각과 주장들이
이 순간에는 온전한 것처럼 느껴진다 할지라도
내 인식의 틀은 항상 부족할 수 있으며,
항상 더 온전한 답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인식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특정의 현상, 사물, 사람에 대한 나의 '내면의 안경' 역시
매일, 매순간마다
부단히 새롭게 대체되어야 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 비로소
내 '사고의 수준' 역시 새롭게 진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작성일: 2005.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