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1-12-08 12:21
:: [혁신 시리즈-프롤로그] 문명진화의 동인(動因)과 걸림돌 ::

 글쓴이 : 최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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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칼럼] 문명진화의 동인(動因)과 걸림돌

                                        최재윤(크로스경영연구소 대표이사/Ph.D)   

http://blog.joins.com/crosslab/7930395

잠시 분주한 일상에 눈을 감고 주변을 둘러보자.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저녁 잠자리에 드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하루하루 삶은 날이 갈수록 더 많은 편리와 쾌적함을 누린다.
우리의 삶이 정신적, 물질적으로 풍요를 더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문명의 이기(利器)’덕분이다.

인간의 문명은 정신적, 물질적 발전의 총체적 산물이다.

철학, 신학, 사회학, 정치학, 심리학. 예술 분야 등에 나타난 다양한 시도들과 새로운 진전은 우리의 정신을 새롭게 확장시키며, 풍요롭게 이끌어 왔다.

또한 과학, 기술, 통신, 생물, 의학, 상업, 건축 분야 등에 나타난 새로운 발견과 발명은 우리의 육체와 환경에 새로운 기회와 부를 선물해 왔다.

오늘 우리가 삶 속에서 향유하는 문명은,
이들 수많은 영역이 오랜 역사만큼이나 그 긴 시간의 여정을 거치며 완성되어 빚어내는 총체적 작품이다.
그윽한 한 잔의 포도주가 존재하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땀과 손길, 그리고 숙성의 오랜 세월이 요구되었듯이 말이다.

문명이 선사하는‘편리와 풍요’를 누리면서
우리가 너무나 쉽게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들 문명의 이기와 혜택이 가능하기까지 어떤 대가가 필연적으로 치러졌는가 하는 사실이다.

또한 ‘과거의 문명’이 일구어 낸 편리의 산물을 마음껏 향유하면서, 한편으로는 오늘의 나와 내일의 우리 자녀들이 누릴 ‘새로운 문명’의 진전은 가로막는 걸림돌(?)로서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대문명은
때로는 국가, 사회적 지원에 힘입은 연구, 개발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수많은 이들의 박해와 조롱에도 불구하고 혼자와의 고독한 싸움을 이겨낸 ‘고집불통의 소수’에 기인한다.

이들에게 ‘지식과 정보화를 중시하는 21세기 사회’에 이르러서야 소위‘혁신가(innovator)'라는 칭호 아닌 칭호를 부여했지만, 이들 생전에 그 결과와 명예를 향유한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어찌되었던 오늘 우리가 누리는 문명적 혜택은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던 수많은 선각자들의
새로운 시도와 고통의 산물임에 틀림없다.

인류문명의 진화는
결국 이들 수많은‘혁신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며, 인류문명의 진화동인은 결국‘혁신(innovation)'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반합(正反合)의 원리처럼
부단히 새로운 진보와 진화를 추구하는‘혁신’세력이 있는가하면, 그 결과는 향유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와 변화를 가로막거나 저항하는 ‘장애’세력이 공존하니 이 또한 인류문명 발달에 있어 또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인류문명사의 다음단계로의 진화 내지 도약을 가로막는
가장 커다란‘장애’세력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혁신가 자신(innovator himself)’이라고.

내가 말하는‘혁신가 자신’은
다음의 두 유형을 동시에 내포하는 개념이다.

한 유형의‘혁신가 자신’은
새로운 혁신을 일구어 낸‘통념적 의미에서의 혁신가’를 의미한다.

또 한 유형은, 현재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과학이 있기까지 헌신했으며, 또한 현재를 빚어내고 있는 ‘그 사회의 주류세력(유, 무형의 조직 및 단체를 포함한)’를 의미한다.

헨리 포드는 인류에게 문명이 가져다 준 가장 커다란 선물중 하나인 '자동차’를 발명하였다.
또한 그는 발명에 그치지 않고, 콘베이어 시스템 등의 혁신적 생산방식을 도입하였다.
그 결과로 포드 자동차회사의 노동자들은 당시 동종업종 일당 $2.34에 비해 파격적인 일당 $5를 지급받았다.

포드는 획기적인 대량생산체제를 고안, 인류에게 자동차 대중시대를 선물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삶의 질(QWL)에도 크나큰 기여를 한 선각자이다.

탁월한 혁신가, 헨리포드!

그러나 그도 예기치 않은 실수를 저질렀다.
‘단일색상 디자인’의‘단일 품종’생산을 고집함으로써 자신의 회사를 위기에 빠트렸던 것이다.

그가 말한 바 있는 ‘멈추는 자는 스무 살이든 여든 살이든 늙은 사람이다. 반면에 끊임없이 배우는 자는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젊은 사람이다. 인생에서 가장 큰 일은 자기의 마음을 젊게 유지하는 일이다.’라는 자신의 유명한 교훈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혁신가에게 있어 가장 큰 장애는
곧 ‘혁신가, 자신’인 것이다.

혁신을 일구어 낸 선각자들에게
사회적 비난, 조롱은 이미 더 이상 큰 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와 같은 고난의 가시밭길을 통과하여
혁신을 일구어낸 노련한 경험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외부의 적은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세상 모두가 자신들의 시도를 갈채와 환호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 일은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는 이에게 가장 두려운 적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의 상실’과 더불어
‘지금까지 일구어 온 성공 경험’이다.

지금 이 자리를 만들어 낸‘성공 경험과 이로부터 파생된 인식과 사고패턴’을 앞으로의‘성공 보장조건’으로 고집하는 순간,
새로운 퀀텀점프의 시도는 원점으로 희귀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소개된 개념중 하나가 바로
소위「학습조직(learning organization)」에서 말하는
‘폐기학습(Unlearning)'이다.

문명진화를 가로막는 두 번째 유형은,
바로 그 사회의 오늘이 가능하도록 공헌한‘주류세력’이다.

어느 문명권이든 처음부터 주류세력으로 탄생한‘주류세력’,
즉 소위 성골이라 일컬음 받을 수 있는 주류 세력(?)은 존재치 않는다.

모두 그 출발점은 태생적으로‘비주류’에서 출발, 특정 시점의 전환점을 기점으로 ‘주류 세력’으로 환생 탈골하는 것이다.
소위 오늘 우리사회에서‘주류’라 일컬어지는 재계, 학계, 예술계, 정계 인사들의 태생과 성장과정을 살펴보라.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이것이 명약관화한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중요한 사실은,
어떤 문명권이든, 어떤 조직체든
기존과 차별화되는 월등한 사회적 진보와 혁신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비주류 세력’에 의해
태동되며, 완성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들의 시도가 빛을 보기까지는
수많은 역경의 노정을 이겨내야만 한다.

그러나 이들의 시도가 성공하는 순간,
이들은 이젠 더 이상 ‘비주류’로 남지 않는다.
이들을 위한 ‘주류의 자리’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비주류’가‘주류’로 환생탈골되는 순간,
창조의 주역, 비주류로서 견지해왔던 생명력을 상실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또한 과거 자신이 가졌던 비주류의 자리를
새롭게 차지하는 새로운 이단자들(?)을
자신의 뒤를 계승할 새로운 생명력의 객체로 인식하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바로 오늘의 자신들을 일구어 낸 창조적 DNA를 계승하거나, 혹은 새롭게 대체할 신진 세력임을 인식치 못한다.

단지 이들의 모든 것들은 '주류세력에 대한 비주류’의 도전으로만 받아 들여진다. 오직 새롭게 확보한‘주류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만이 시작되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힘들여 얻은‘주류 세력’으로서의 존속을 위한
새로운 응전(應戰)을 시작할 따름이다.
이 응전은 때로는 문화적, 사회적 안정대로 작용한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진보와 혁신을 가로막는 지렛대로 기능한다.

정치, 경제, 과학, 의학, 법조 분야 등을 떠나서
그 가장 쉬운 예를 탁월한 발명가, 에디슨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지 않은가.

에디슨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듯이
최초의‘전기 발명가’이다.

그가 직류방식의 전기를 발명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전류 형태인‘교류방식’이 웨스팅 하우스(George Westinghause)에 의해 발명된다.

이 때 에디슨이 보여준 태도는
‘우리가 존경하는 발명왕, 에디슨’과는 전혀 상반된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직류방식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교류방식은‘사형제도에 사용될 수 있을 만큼 치명적이다’는 극단적 위험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교류방식을 사용한 '전기 사형의자'까지 발명하게 된다.

만약 에디슨의 주장으로 교류방식이 사회적으로 금지되거나, 폐기되었다면 오늘 송전소를 통해 우리 가정과 직장에 효율성을 갖는 전기가 공급될 수 있었을까?

오늘날 한국 사회는
소위 ‘주류’와 ‘비주류’간의 도전(挑戰)과 응전(應戰)이
그 어느 국가체제보다도 가장 심각한 상태에 도달해 있다.

어떤 이들은 이와 같은 현상을 설명함에 있어
‘좌익’과 ‘우익’,
‘친미세력’과 ‘반미세력’,
‘보수세력’과 ‘진보세력’ 등의 이분법적 용어와 잣대를 동원하기도 한다.

그 표현은 어찌 되었든
우리 문명의 진보와 혁신을 위해서는,
우리 자신 모두가
자신의 뿌리와 그 태동 근원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솔직한 자문(自問)이 요청된다.

또한 지금 나의 사고와 행동을 움직이는
내면적 메커니즘의 동력은
언제, 어디서 부터 연유하며,
또 무엇을 위한 몸부림인가? 에 대한
깊은 고민도 함께 말이다.


작성일: 2006. 4. 21 독도를 둘러싼 한일간 갈등이 한창인 한 날, 저녁무렵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