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1-12-08 12:03
:: [패러다임 시리즈 4] 지혜의 원천(源泉) ::

 글쓴이 : 최재윤
조회 : 985
[기고잡지: 월간 Always! KESCO,  Vol.22(2007.07월호) 경영칼럼, 서울: 한국전기안전공사]</font>
http://blog.joins.com/crosslab/8441486

드라마에 별반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내가 푹 빠졌던 사극이 하나 있었다. 얼마 전 종영된 인기 사극 '주몽'이 바로 그것이다. 드라마에 빠져든 이유 중 하나는, 문득문득 깜짝 놀라는 ‘일종의 사고 전환’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그중 대표적인 '사고 전환'의 절정판 하나는 다음과 같은 스토리였다.
 
막내 왕자 주몽이 소금의 결핍으로 위기에 빠진 부여국을 구하기 위해 고산국에 있다는 전설로만 내려오는 '소금산'을 향해 출발한다. 필요한 경비와 인력의 조달은 연타발 상단(商團) 주인의 딸 '소서노'에게 조건을 내세워 해결한다. 문제는 중간 기착지인 '행인국'이라는 부족 국가에 다다르면서 시작된다. 행인국을 넘어 고산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비적떼들이 막고 있는 험난한 산악 통로를 지나야만 한다. 그런데 그 비적떼와 두목이 문제였다. 그는 이전 행인국 장수였다. 지금은 관직을 박탈당한 채, 비적떼 두목노릇을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연타발 행단의 이 여인, 소서노 때문이었다. 그는 과거 '소서노'가 이끈 연타발 상단과 자국을 위한 무기 밀거래를 해왔다. 와중에 탐심이 생겨 무기 대금은 자신이 취하고, 행단의 검을 빼앗고 이들을 모두 죽이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때 오히려 행단과 '소서노'에게 패해 죽을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로 인해 자국의 장군 관직에서 쫓겨나, 이젠 비적떼 두목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니 이 비적 두목에게 있어 소서노는 자신을 하루아침에 '장수'에서 '비적'으로 몰락케 만든 철천지 원수인 셈이 된다. 그러니 이들이 행인국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죽이기로 작정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소치였다.
이 소식을 접한 행단은, 소금 구하기를 포기하고 자국으로 돌아가길 모두가 원한다. 이 여인조차도.
그러나 주인공 주몽이 이를 거절하고, 비적떼에게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갔다가 체포된다. 그리고 이 소식을 상단의 여인, 소서노가 듣게된다.

만약 당신이 이 여인이라면 어찌하겠는가?

이 여인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바로 그 비적떼 두목을 찾아간다. 그리고 자신을 원수로 여기는 비적 두목에게 일종의 ‘조건부 거래’를 내세운다. 이 여인의 행동 자체가 ‘기존 관념 깨뜨리기의 절정판’이었다. 

여인은 자신을 죽이려는 비적 두목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지금 당신과 거래를 하기 위해 찾아 왔습니다. 지금 당신이 나를 죽여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당신이 이전 장수의 지위보다 더 높은 관직으로 명예 회복될 것을 거래 조건으로 내세우겠습니다. 지금 나를 죽이면 나는 죽으면 그만이지만, 당신 역시 평생 비적떼 두목으로 끝나지 않습니까?
그러나, 만약 나와 함께 소금산을 찾는 여행길에 동행하여 성공한다면, 과거 당신이 잃어버린 장수직보다 더 큰 관직에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겠습니다. 

자, 이제 내 거래 조건을 취하겠습니까?
아니면 나를 죽이는 것으로 끝내겠습니까?"

지극히 단순한 조건을 제시한다.

만약 당신이 비적떼를 이끌고 있는 두목이라면, 이 여인의 '조건부 협상 제의'를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결국 이 여인은 자신을 죽이고자, 이를 갈며 기다리던 비적떼와 그 두목을 오히려 험난한 여행길의 ‘호위무사’로 거느리고 출발한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 전혀 예기치 않은 새로운 행운을 누리게 된 것이다. '위기와 역경'을 '새로운 기회'로 전환시킨 것이다. 이를 두고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하던가.

우리네 삶 역시, 이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우리가 현실에 안주(安住)하려는 자라면 상관없을테지만, 현실을 넘어 ‘소금산’이란 이상(理想)을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는 자라면, 삶의 매순간마다 우리 앞길에 매복하고 있는 ‘비적떼’와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그때마다, 우리에게도 이 여인과 같은 '선택(選擇)'과 '기지(機智)'가 요구된다. '되돌아 갈것인가? 아니면, 계속 전진할 것인가? 또 전진을 선택한다면, 저 '비적떼'는 어떻게 넘어 설 것인가?'

그렇다면 이 여인과 같은 기지(機智)는 무엇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일까?

첫째, ‘이상과 사랑의 존재 여부’이다.
기지를 만들어내는 첫째 원리는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라는 삶의 자세이다. 그러나 이 용기는 아무 일에나, 아무 때에나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전 생명을 걸 수 있는 ‘이상(理想)’과 ‘사랑’ 앞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상'과 '사랑'은, 우리의 삶이 비굴하거나 저급한 인생으로 하락하는 걸 예방하는 '고상한 힘'이다. 또한 우리의 삶 속에서 내가 알고 있는 내 능력 이상으로 내 행동을 이끄는 '무서운 힘'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나를 이끄는 ‘이상’과 ‘사랑’의 존재를 확인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내게 있어 모든 생명을 걸 수 있는  ‘이상’과 ‘사랑’은 무엇인가? 그리고 진정 그러한 '이상'과 '사랑'이 내게 존재하는가? 

둘째, 눈앞 현실에 압도당하지 않는 ‘정신적, 심리적 여유’이다.
눈앞 현실에 압도당할 때 ‘눈앞이 캄캄해졌다’라는 표현을 쓴다. 일단 눈앞이 캄캄해지면 우리는 다른 대안을 생각해낼 능력을 상실한다. 왜냐하면 이는 '사고의 마비'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사고의 마비는 '새로운 사고로의 전환'을 가로막는다. 따라서 항상 이를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정신적, 심리적 여유를 유지하도록 습관화하여야 한다.   

셋째, 유연한 사고를 즐기는 ‘낙천적 기질의 습관화’이다.
이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로부터 연유한다. 절벽 가장자리에서 우리가 취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부정적, 절망적 삶의 태도를 가진 이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보일 따름이다.
그러나 생각을 뒤집어 보면 대안(代案)은 여러 가지이다.     
장차 주몽의 왕비로 간택되어진 여인, '소서노'의 지혜는
우리 모두에게도 이미 내재되어 있다. 단지 우리의 ‘무지(無智)’, 우리의 변하지 않는 성품(性品)과 기질(氣質)로 인하여 잠자고 있을 따름이다.

오늘 이 순간,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오늘 이 순간, 우리가 넘어가야만 하는 '비적떼'는 무엇인가?

이 여인네 마냥, 한번 살짝 생각을 바꾸어 봄 직하지 않을까?

칼럼작성일: 2006.8.8